미드는 미국인류학의 시조인 프란츠 보아스의 여자 제자들로서 루스 베네딕트와 함께 문화와 인성 분야에 학문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미국의 청소년들의 성교육은 청교도적 윤리관에 의해 금욕적인 억압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2차성징이 나타나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성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미드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의 사춘기 아이들은 개방된 성관계를 가지게 됨으로 격동의 사춘기를 자연스럽게 치르는 것을 민족지로 기술함으로 미국 청소년의 성교육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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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베네딕트의(44세) 당시의 사진이다. 베네딕트는 홀어머니 밑에서 여동생과 함께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에 열병을 앓아 가는귀가 먹어서 어른들이 부르는 소리에 그다지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외향적이기 보다는 내향적인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그래서 문학적 소질이 키워질 수 있어서 시인이 되었다. 첫 번째 결혼으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남편과 이혼한 체 평생을 혼자 살았다.
거기에 비해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성품의 미드는 4번 결혼을 하였다. 미드는 어린시절에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이사를 여러 번 다녀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낯선 학교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경험이 인류학자로서 낯선 이국문화에 쉽게 적응하면서 새로운 민족지를 기술하는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훈련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두 여류 인류학자들의 예를 보더라도 어떤 인성을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인성을 가지게 되는 배경을 알게 되면 그 특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