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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9 한국사회 변동과 미술
    etc./사회학개론 2009. 6. 16. 11:42
     
       
     
    아래 그림은 한국인 최초의 화가 고희동의 자화상 두 점이다.


     
       
      한국의 근대를 서양 및 일본으로 문호개방을 그 시기로 본다면, 이를 통해 접하게 된 서양미술은 양식사적인 측면에서 근대주의(modernism), 정신으로서 근대성(modernity)을 동시에 전해 주었던 셈이다. 새로운 예술과의 만남이 한국사회 변동에 미치는 역동적 관계를 미술사를 통해 파악해 본다.

     
    18세기 후반-20세기 초의 특성은 전통 화가들의 양풍미술의 수용과 외국인 화가들에 의한 서양미술의 소개라고 보겠다.
         
    사의중시(寫意) 회화관에서 벗어나 정확한 형태묘사와 음영기법으로 대상의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통화단의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도화서의 초상화의 대가 채용신, 김두량, 이희영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화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화가들, 미국인 휴버트 보스( Hubert Boss), 불란서인 폴 자크레(Paul Jacoulet)의 활동을 통해 양풍미술이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1920년대는 한국인 서양화가의 배출과 화단 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고희동이나 김관호 등 초창기 일본유학파 들은 일본을 통해 습득된 유화기법을 우리나라에 소개, 신 미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유학 도중이나 그 이후에 구미로 유학을 떠난 화가들의 활동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구라파는 아방가드 예술이 자리 잡고 예술가들의 삶은 비일상적인 혹은 보수적인 규범이나 사회적 틀을 과감히 벗어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류화가 나혜석은 당시 가부장적인 전통의 가치에 삶으로 거부하는 행동을 감행함으로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1930년대-1945년은 당시 구라파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다양한 이념에 기초한 미술사조들이 일본을 통해 접해졌고 이를 배경으로 그룹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로 오지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당시 구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미에서 아방가드의 하나인 추상화가 우리에게 수용되는데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밝은 톤의 풍경화나 “남향집”같은 우리네 포근한 일상성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대중적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이다.

    표현주의는 구본웅을 중심으로 그룹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그는 특히 당시 소설가 이상과 예술적 교류를 하며 이러한 감수성을 과감히 표현하는 작품을 남겼다.

    유럽에서도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에 의해 새롭게 소개되었던 추상주의를 동경 유학시절에 만난 김환기는 우리 전통미학의 고유성을 절제된 선, 점, 면으로 구성한 추상화로 표현하였으며 추상화 그룹 활동의 중심화가로 활동하였다.

    일제 식민지 하에 한국사회의 엘리트였던 화가들 중에 사회주의 이념에 심취하는 것은 있을 수 있었던 일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군중이라든지 소외된 민중을 소재로 임군홍, 이쾌대 등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편 우리 전통 산수화에도 근대성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모색의 활발한 그룹 활동이 동연사 동인들의 움직임이었는데 변관식, 이상범, 노수현 등이 그 주축 멤버였다. 이들은 관념적인 소재를 다루던 전통 산수화와 다르게 주변의 실재하는 자연에서 예컨대, 일반인에게 친숙한 우리 마을의 풍경을 화재로 취했다. 김은호 역시 도식적 인물화에서 주변 인물을 현실감 있게 다룸으로 문인화나, 양반들의 풍류의 하나로 서민들에게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그림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1945년대-6.25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광복과 전쟁기 미술로 특징되고 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과 분단은 화단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 시켰다. 예컨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이쾌대, 임군홍 등은 월북 작가로 일반인들은 한 동안 이들의 작품이나 활동에 대해서 자료를 접할 수 없었고 1990년대 해금됨으로 한국 미술사의 공백이 메워질 수 있었다.

    한편 국방부 종군 화가인 이수억 등이 전쟁 기록화를 남겼다.
     
         

     
    휴전후-60, 70년대는 분단과 산업근대화가 가져온 예술창작의 단일 코드화로 특징된다.
         
    해방이후 분단과 6.25전쟁의 경험으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단일코드에 짓눌려 예술 생산이나 소비가 제한된 혹은 위축된 시절이었다.

    박수근(1914-1957), 변관식(1899-1976) 등은 국전의 보수성에 피해 입은 당사자로 국전파에 의해 소외되었던 대표적 화가들이다

    구상계열의 국전파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추상화는 김환기, 이응로 해외체류화가의 활동이 명성을 얻게 되었고, 국제전에 출품된 김창렬, 박서보 등 국전이라는 국내 인증의 상품가치보다 국제적 인증의 상품가치로 업그레이드되기에 이른다.
     
         

     
    80년대-광주,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와 예술의 이항 대립적 코드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반 국전 운동은 보수적 화단에 변화를 낳았으나 70년대 추상미술의 한계는 국제적인 인정은 일부 받았으나 미술은 어렵다, 뭔지 모르겠다 는 등 대중과 괴리되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항쟁이 문화예술인에게 민족과 민중이라는 의미를 자각케 하였다. 이어진 민주화의 열기와 더불어 민중미술은 미술계 내부의 개혁을 기도하기보다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서 민중적 정서를 소통 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여기에 중심인물은 홍성담, 신학철 등이다.

    1980년 폐지된 국전을 대신하여 언론기관을 통한 공모전 등이 공인의 권위를 이양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학중심의 아카데미즘은 민중미술로부터 이념적 도전과 비판을 받으면서도 예술의 상업성과 선택적 친화력이 이루어짐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는 개발시대에 구축되었던 경제적 기적과 3저 현상과 올림픽 특수에 의해 고도성장이 이루어졌던 시대로, 서구 시민사회 미술제도의 근대적, 물질적 토대가 비로소 이루어져 규모의 부가 미술계 내부로 유통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미술생산과 소비구조가 사장성에 맡겨지기까지는 일정한 물적 토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화가들의 개인화실, 화상, 화랑전시회, 비평가들의 역할과 개인 컬렉션의 구축망 내에 참여하는 인구수나 자본의 규모가 양적으로 팽창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가능하였다.
     
         

     
    90년대-정치권력의 문민화, 경제적 세계화는 예술소통의 다항코드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민중들의 미학에 다가갈 수 없었던 민중미술은 민주화와 더불어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자생력 있는 작가들은 다항코드의 하나로 남게 된다.

    페미니즘, 환경문제, 동양적 시각과 사고, 전통미학에 대한 관심 등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다원주의를 낳았다. 김수자의 보자기 설치미술은 생태여성주의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만화나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설치물, 거리 낙서화인 그래피티, 영롱한 구슬을 이용한 이불의 작품 들은 기성미술의 장르를 넘은 여러 표현기법을 할용하고 있다.
     
       
     
       
     


    한국사회 변동에 미치는 역동적 관계를 미술사를 통해 파악해 본다면,

    18세기 후반 - 20세기 초의 특성은 전통 화가들인 양풍미술의 수용과 외국인 화가들에 의한 서양미술의 소개라고 보겠다.

    1910년대 - 1920년대는 한국인 서양화가의 배출과 화단 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1930년대 - 1945년은 당시 구라파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다양한 이념에 기초한 미술사조들이 일본을 통해 접해졌고 이를 배경으로 그룹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1945년 -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광복과 전쟁기 미술로 특징되고 있다.

    휴전후 - 60, 70년대는 분단과 산업근대화가 가져온 예술창작의 단일 코드화로 특징된다.

    80년대 광주,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와 예술의 이항 대립적 코드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90년대 정치권력의 문민화, 경제적 세계화는 예술소통의 다항코드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1930년대 □□□의 대표적 화가로 오지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당시 구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미에서 아방가드의 하나인 추상화가 우리에게 수용되는데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휴전 후 60, 70년대는 분단과 산업근대화가 가져온 예술창작의 □□□□□로 특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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