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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한국인 최초의 화가 고희동의 자화상 두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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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를 서양 및 일본으로 문호개방을 그 시기로 본다면, 이를 통해 접하게 된 서양미술은 양식사적인 측면에서 근대주의(modernism), 정신으로서 근대성(modernity)을 동시에 전해 주었던 셈이다. 새로운 예술과의 만남이 한국사회 변동에 미치는 역동적 관계를 미술사를 통해 파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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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20세기 초의 특성은 전통 화가들의 양풍미술의 수용과 외국인 화가들에 의한 서양미술의 소개라고 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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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중시(寫意) 회화관에서 벗어나 정확한 형태묘사와 음영기법으로 대상의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통화단의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도화서의 초상화의 대가 채용신, 김두량, 이희영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화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화가들, 미국인 휴버트 보스( Hubert Boss), 불란서인 폴 자크레(Paul Jacoulet)의 활동을 통해 양풍미술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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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1920년대는 한국인 서양화가의 배출과 화단 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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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이나 김관호 등 초창기 일본유학파 들은 일본을 통해 습득된 유화기법을 우리나라에 소개, 신 미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유학 도중이나 그 이후에 구미로 유학을 떠난 화가들의 활동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구라파는 아방가드 예술이 자리 잡고 예술가들의 삶은 비일상적인 혹은 보수적인 규범이나 사회적 틀을 과감히 벗어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류화가 나혜석은 당시 가부장적인 전통의 가치에 삶으로 거부하는 행동을 감행함으로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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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1945년은 당시 구라파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다양한 이념에 기초한 미술사조들이 일본을 통해 접해졌고 이를 배경으로 그룹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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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대-6.25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광복과 전쟁기 미술로 특징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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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과 분단은 화단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 시켰다. 예컨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이쾌대, 임군홍 등은 월북 작가로 일반인들은 한 동안 이들의 작품이나 활동에 대해서 자료를 접할 수 없었고 1990년대 해금됨으로 한국 미술사의 공백이 메워질 수 있었다.
한편 국방부 종군 화가인 이수억 등이 전쟁 기록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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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후-60, 70년대는 분단과 산업근대화가 가져온 예술창작의 단일 코드화로 특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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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광주,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와 예술의 이항 대립적 코드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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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정치권력의 문민화, 경제적 세계화는 예술소통의 다항코드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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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민중들의 미학에 다가갈 수 없었던 민중미술은 민주화와 더불어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자생력 있는 작가들은 다항코드의 하나로 남게 된다.
페미니즘, 환경문제, 동양적 시각과 사고, 전통미학에 대한 관심 등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다원주의를 낳았다. 김수자의 보자기 설치미술은 생태여성주의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만화나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설치물, 거리 낙서화인 그래피티, 영롱한 구슬을 이용한 이불의 작품 들은 기성미술의 장르를 넘은 여러 표현기법을 할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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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변동에 미치는 역동적 관계를 미술사를 통해 파악해 본다면,
18세기 후반 - 20세기 초의 특성은 전통 화가들인 양풍미술의 수용과 외국인 화가들에 의한 서양미술의 소개라고 보겠다.
1910년대 - 1920년대는 한국인 서양화가의 배출과 화단 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1930년대 - 1945년은 당시 구라파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다양한 이념에 기초한 미술사조들이 일본을 통해 접해졌고 이를 배경으로 그룹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1945년 -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광복과 전쟁기 미술로 특징되고 있다.
휴전후 - 60, 70년대는 분단과 산업근대화가 가져온 예술창작의 단일 코드화로 특징된다.
80년대 광주,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와 예술의 이항 대립적 코드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90년대 정치권력의 문민화, 경제적 세계화는 예술소통의 다항코드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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